제곧내.
약물 의존성이 생겼다.
일단 이 이야기를 꺼내려면 지난 날의 약물 의존 스토리를 꺼내야 한다.
때는2022년...
불안장애가 심화되며 정신과를 찾게 되었고,
그 곳의 의사는 상태가 안좋을 때마다 약을 더 먹어도 된다고 했다. 나는 솔직히 말해 기뻤다. 처음 처방받은 약물이 내 몸에 들지 않는 기분이 강하게 느껴졌고, 그 당시 다른 치료요법을 병행하기엔 너무 바빴다.
약물 치료만이 온리 원 웨이였다.
점점 나는 '약이 없으면 안돼!' 라는 가치관을 가지게 됐고, 단약(약의 용량을 감량)하는 것에 극한 거부감을 느꼈다.
약을 먹어야만 느낄 수 있는 기쁨과 웃음(지금 생각하면 거의 조증 수준이었다)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주변환경이 변하며 어쩔 수 없이 정신과를 바꿔야 했고, 바뀐 정신과 의사는 내가 먹던 약이 의존가능성이 매우 강한 약이라며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
나는 성분이 비슷하지만 덜 강한 약으로 처방받고, 새로운 의사와는 상담과 인지행동치료도 거의 병행하기 시작했다. (인지행동치료라기보다는 '이럴 땐 이렇게 해보세요.' 라는 식으로 지시를 해주는 것이었다)
처음엔 새로운 의사의 처방이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난 예전 약이 더 좋은데!' 라고 몇번이나 생각했다.
새로운 의사, 줄여서 의사 N(new를 줄였다)은 내 증상을 가볍게 보고 빨리 해치우려는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약을 받기 위해 해당 정신과에 갈 때마다 내 생각은 조심스럽게 변해갔다.
아마 나에게 더 이상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도 사라지고, 생활 방식도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내 사고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 같았다.
정신과의 리셉셔니스트도 좋았고 정신과의사가 묻는 안부인사, 내 고민을 이야기하면 진지하게 고민하며 원인과 해결책을 조심스레 제시하는 모습이 그제서야 보였다.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며 웃게도 해주고 진료 끝엔 꼭 응원인사를 건네주는 것이 감사했다.
사실 평상시 기분이 나아지거나, 자기파괴적 사고가 줄어들진 않았지만 불안장애 특정증상은 좀 나아진 것 같았다.
그래서 의사N에게 요즘엔 더더 나아지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의사N은 조심스럽지만, 그러나 꼭 해야했던 말을 했다.
이제 약을 줄여야겠지 않겠냐고.
나도 찬성했다.
매일 묶인 듯이 먹는 약은 뇌전증약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때 와서야 느낀 것이지만, 난 약물에 정말 의존하고 있었고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내가 먹던 약은 의존성이 굉장히 강하기 때문에 아주 조금씩 양을 낮춰야 했다.
두 알에서 한 알 반, 한알 반에서 한알 반의 반, 한 알 반의 반에서 한알... 한 알에서 4분의 3 알, 거기에서 아예 4분의 2알...
그렇게 아주 조금씩 나눠서 줄였는데도 단약 부작용은 있었다. 2-3일 동안은 힘들었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걸음거리가 휘청거렸다. 내 몸의 중심이 잡히지 않아 제대로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지금 기억나는 부작용은 이것이 다지만, 아무튼 밖에 나갈 컨디션은 무조건 아니었다. 청소나 설거지, 샤워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 막 태어난 송아지가 된 느낌이었다.
지금의 나는 단약을 멈추고 약의 양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내 뇌전증 증상에 단약이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의사H(Hospital의 H)의 지시였다. 지금 먹고 있는 정신과 약은 내가 먹고 있는 뇌전증 약에도 큰 영향이 없다며, 단약은 더 늦춰도 된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약물의 의존성에 대해 쓰기 위해서였다.
이 뒤로부터가 이 글의 본론이다.
클로바잠, 넌 양날의 검이다
나는 뇌전증 증상이 발생한 후 초기에 응급약으로 클로바잠(한국에서는 센틸정)을 처방받았다. 발작이 일어날 것 같을 때, 전조 증상이 있을 때 먹으라는 용도였다.
클로바잠을 응급약으로 같이 처방받았을 당시, 나는 그 약을 복용할 일이 별로 없었다. 부모님과 떨어져 자취를 하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응급약을 먹을 만큼 상태가 안좋아졌다는 걸 가족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걱정할 게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한번씩 발작을 일으키긴 했다. 컴퓨터를 장시간 쳐다보면, 뇌 신경에 전자파 자극이 과하게 들어와 나도 모르게 의식을 잃고 발작을 했었다. 자취를 하는 동안엔 몇 분동안 발작을 했고 몇 분동안 의식을 잃고 그냥 잠에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게 고충이었다.
발작을 한 내 몸은 꼭 물이 가득 들어간 풍선 같았다. 내가 축 처진 몸으로 침대 매트리스에 가만히 누워있으면 경련하던 모든 내장과 근육들의 고통이 밀려들어왔다. 나의 갈비뼈가 발작하는 동안 팽창하고 수축하느라 고생한 폐를 파고 드는 기분이 들었다. 운이 나쁠 땐 근육의 경련이 멈추지 않았고 어지럼증도 동반되었다. 물론 몸을 달달 떨면서 씹은 혀와 잇몸의 혈액도 삼키면서 말이다.
서론이 길어졌다.
본론을 말하겠다.
클로바잠은 이런 발작을 예비에 멈추기 위해 존재한다. (다른 목적으로도 쓰인다)
나는 모호한 처방안내를 받아서 하루에 최대 4개를 먹을 때도 있었다. — 나는 클로바잠 10mg을 처방받았다.
문제는 클로바잠을 먹었을 때의 효과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12월 9일부터 난 발작은 없는, 오로지 전조 증상에만 시달리고 있다. (발작이 없다는 것은 축하할 일이다)
스트레스는 12월 3일부터 급격히 증가했고, 정신과 약의 단약 또한 이 증상에 영향을 끼쳤을지 모른다.
뇌전증의 가장 엿같은 점은 (비속어는 최대한 쓰고 싶지 않지만, 사실 그대로를 써야했다) 의사와 환우들마저도 내 증상을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며,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환자의 증상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클로바잠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내가 전조증상을 느끼기 시작할 때 클로바잠을 먹으면, 그것은 전조증상을 느끼는 시간을 줄여줄 뿐이다. 클로바잠을 먹지 않았을 때의 전조 증상 지속 시간이 3-40분이라면, 클로바잠을 먹었을 때엔 2-30분으로 줄어든다.
시간이 줄었으니 좋은 거라고 생각 할수도 있다. 물론 좋긴 하다. 부정할 순 없다. 그러나 당신(독자)는 전조 증상의 심각성을 공감하고 똑같이 느껴봐야 한다. 그렇다면 내 이야기에 더 깊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예를 들어보겠다.
당신은 100m 달리기를 학창시절에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열심히 달렸다면, 모든 신체가 공중에 떴다가 땅에 부딪히면서 당신의 관절이 격하게 충돌하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완주한 후에는 열뛰게 마찰된 당신의 발목과 발에 고통을 느낄 것이다. 폐와 가슴은 당신이 얼마나 숨을 크게 쉬든 가라앉지 않고 흥분한다. 당신의 심장은 당신의 머리 위에 올라가 춤을 추듯이 쾅쾅거린다. 당신은 잠시 멍함을 느끼고 주변의 자극에 예민해진다. 당신은 선생님의 지시에 정신을 차리지만 몸은 체력을 다 써서 힘없이 대기 줄에 서있을 뿐이다.
당신은 그러는 와중에, 공기 중의 투명한 손이 온몸의 근육을 마사지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 당신은 배가 아파온다.
그러는 와중에 당신은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동시에, 당신은 이름 모를, 출처 없는 패닉을 느낀다.
나의 전조 증상은 이것을 한 데, 한 순간에 느끼는 것이다.
'오, 이런, 전조가 오는군' 하고 깨달은 순간 이미 늦었다. 이후로 클로바잠을 먹든 안먹든 30분은 고통의 시간이다.
하지만 왜 나는 클로바잠에 중독된 것일까?
무뎌지는 감정, 붕 떠 있는 느낌
절대 클로바잠을 악용하라고 쓰는 글이 아님을 미리 밝힌다.
나는 클로바잠을 전조 증상 중 한개라도 느끼면 미리 먹는 편이다. 착각으로 느낀 것일 수도 있고, 스트레스때문에 느낀 신체적 작용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불안함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전조증상과 발작을 대비하기 위해서 클로바잠을 복용하게 된다.
여기부터 시작된다.
본격적인 전조 증상이 시작되진 않았지만 예비용, 그리고 혹시 몰라서 클로바잠을 먹었을 때 나는 사교성이 높아진다. 본래의 나의 예민한 기질이 진정되면서 원래 신경쓰던 것들에 신경쓰지 않게 된다. 나는 도전적이고 잘 웃는 사람이 된다.
원래의 나였더라면 하루에 아래에 써진 생각을 10번 이상 한다.
'왜 저런 말을 쓰지? 저런 단어를 쓰는 것 참 싫은데. 나는 안쓰도록 조심해야지. 그러면 어휘력을 키워야 해. 요즘 나는 SNS만 하니까. 책을 읽어야 하는데 할일이 너무 많아. 오늘 만날 사람들은 날 어떻게 볼까? 근황은 뭐라고 얘기해야하지? 날 평가할거야. 내 말투가 조금 이상한가? 의자에 앉을 때엔 내가 먼저 안내해줘야지. 그게 좋은 사람이잖아. 으! 사람이 너무 많아. 우리가 이야기하는 걸 다 들을거야. 입을 꾹 닫고 있어야겠다. 나랑 있는 사람들이 논란될 거리를 이야기안했으면 좋겠어. 이 장소에 있는 사람들이 우릴 이상한 사람으로 보면 어떡해?'
정말 과한 생각이다.
그러나 클로바잠을 먹은 후에는 생각이 없어진다.
그저 현실에 충실해지는 느낌이 든다. 타인의 평가나 시선, 제약은 애초에 떠올리지 않게 되고 마음이 편해진다.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며 긴장을 하지 않게 된다. 그때 깨달았다.
'이거 좋은데.'
그때부터 망한 것이다.
클로바잠은 항불안제로도 쓰인다. 설명서를 열심히 읽어본 나는 잘 알고있다. 정신과에서 늘 '괜찮아지고 있다'며 거짓말하는 나는 정신과약은 단약하려고 노력 중인 동시에, 뇌전증약을 정신과약으로 남용하고 있던 것이다.
이건 심각한 문제다.
난 약물 중독의 길로 가고 있다.
나는 해외 reddit에 이 고민에 대해서 글을 올렸다.
많은 유저가 충고와 응원의 댓글을 달아주었고 내가 정말 약물 중독에 빠지고 있단 것을 깨달았다. 젠장할!
망할! 이런 엿같은!
난 그저 전조 증상과 불안장애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한다. 현실을 도피할 수는 없다. 사람의 인생은 이상적이지 않으니까.
내가 할 일은 단 두 개이다.
1. 뇌전증과에 가서 의사H에게 전조증상과 클로바잠 복용일지를 보여준다. 나의 불안함과 클로바잠 남용 사실을 알리고 클로바잠의 복용 기준, 전조 증상을 제대 로 치료할 약을 알려달라고 한다.
2. 정신과의 의사N에게 나는 정신적으로 아직 불안하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클로바잠을 남용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린다.
이 글은 끝이 아니다.
약물중독자의 글이 아니며,
나는 이 길에서 빠져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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